행정복지센터
안양의 유래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만안구 석수1동 산 27, 28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즉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이다.
안양2동은 1964년 1월 1일 안양읍 안양2리에서 1973년 7월 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2동이 되었다. 안양이란 지명은 신라 효공왕 4년(900년)에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금주(지금의 시흥)와 과주(과천)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 마침 삼성산을 지나는데, 산꼭대기에 구름이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왕건은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구름 아래서 능정이라는 늙은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님의 뜻이 왕건의 뜻과 같아 이곳에 안양사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안양사에서 안양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서 안양이란 뜻은 모든 일이 원만하고 만족스러우며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이 없는 이상향(상상 속의 낙원)을 말한다.
안양예술공원 남쪽 길가 및 삼성천 주변의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석공이 많이 산다고 하여 석수동으로 불렀습니다. 1930년대 초 마을 앞에 석수동 수영장이 생기면서 석공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석수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안양시 북쪽에 있어 북부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야생조류의 서식처였으나 일본강점기 때 일본인 오끼가 안양에서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한 곳이기도 합니다. 광복 후 안양 최초의 극장인 화단극장이 생겼고 안양여중·고, 만안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