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복지센터
박달2동
삼봉마을(三峰洞)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참고: 안양시지

범고개(虎峴洞)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고개 이름을 취해 범고개(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 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 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 등을 시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마을에서는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참고: 안양시지

웃박달리(上博達里)

조선 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김씨 등 15여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참고: 안양시지

능골(陵谷)

범고개 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 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 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픈물 주민들 함께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과 세원 화학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참고: 안양시지

동수암(東秀岩)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 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참고: 안양시지

미름물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 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 명도 우물 명을 취해 미름물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졌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본 강점기에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 (1575-3428, 응교), 엄황 (1580-3453, 영흥부사), 엄정구 (3405-3470, 한성좌윤) 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참고: 안양시지

붓골(筆洞. 富谷)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해 40여 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곡(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이 있었으나, 일본 강점기에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 때 (1591) 사회(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왜란을 피하고자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오로 향하던 중 왜병 수천 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도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하고 상소하여 숙종 34년(1708)에 정려를 내려 이곳( 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참고: 안양시지

샛터말(新其村)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참고: 안양시지

선녀골(仙女谷)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 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 하여 "선녀골"(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 이씨 령군파가 집성(20여 호)를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참고: 안양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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